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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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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목의 변은 1449년 명나라 정통제가 오이라트 에센 타이시에게 포로로 잡힌 사건이다. 명나라는 1406년부터 몽골 부족과의 조공 무역을 통해 말과 가축을 수입하고 비단 등을 수출했지만, 에센 시대에 무역 제한과 사절단 대우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의 침략을 받았다. 명나라는 영종제가 친정을 나섰다가 토목보에서 대패하여 영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겪었다. 그러나 북경 방어전을 통해 위기를 넘겼고, 에센은 영종을 석방했지만, 이 사건은 명나라의 군사 개혁을 촉발하고 동아시아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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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의 변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이름토목보의 위기
다른 이름토목의 변
기사지변
날짜1449년 9월 1일
장소화이라이 현, 북직례, 명나라
결과몽골 승리
명나라 영종 황제 포로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북원, 오이라트 몽골
교전 세력 2명나라
지휘관
지휘관 1타이순 칸
에센 타이시
알라그-테무르
지휘관 2영종 황제 (포로)
왕진 (전사)
장푸 (전사)
전력
전력 120,000명
전력 2500,000명
사상자
기타 정보
중국어 간체土木堡之变
중국어 번체土木堡之變
병음Tǔmùbǎo zhībiàn
다른 이름Tumu Crisis
중국어 간체 2土木之变
중국어 번체 2土木之變
병음 2Tǔmù zhībiàn
다른 이름 3Jisi Incident
중국어 간체 3己巳之变
중국어 번체 3己巳之變
병음 3Jǐsì zhībiàn
이미지
토목 위기
토목 캠페인 지도, 1449년

2. 배경

정통제 영종 대에 이르러 환관 왕진의 전횡으로 명나라 조정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1449년,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가 세력을 확장하여 명나라와 무역 교섭을 시도했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었다.

오이라트는 유목 국가의 특성상 경제를 교역에 의존했기 때문에 중국 물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명나라와는 원래부터 조공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에센 시대에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오이라트는 더 많은 교역품을 얻기 위해 명나라에 더 많은 사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에 부담을 느껴 무역을 제한했고, 1448년에는 사절에 대한 하사량을 크게 줄였다. 또한 에센이 명나라 황녀와의 혼인을 청했으나, 이는 명나라 통역관들이 독단적으로 에센과 약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이에 에센은 명나라에 침입하여 약탈한 전리품으로 지배하의 유목민의 구심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군사적 압력으로 기존의 후대를 요구하고자 했다. 또한 혼인을 거절당한 것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복의 측면도 있었다.

한편,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북방 국경 방어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군사 농민들은 장교들에게 착취당했고, 훈련, 무기, 장비의 질이 저하되었다. 북경 수비대는 방어 시설보다 황궁 관련 건설에 더 자주 동원되었다. 북방 국경 방어는 선부, 대동, 북경의 세 주요 요새 도시에 의존했는데, 방어 체계는 심도가 부족했고 신속한 대응에 의존해야 했다.

2. 1. 명나라와 몽골의 관계

1406년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마시' 형태로 이루어졌다. 명나라는 말과 가축 및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의류, 식량 등을 수출했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였으나, 에센 시대에는 3,000명까지 늘어났다. 주변 위구르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증가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다. 1448년 사례감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 무역만 허용하고, 말 값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다.

몽골은 남동쪽의 우량카이, 동쪽의 동몽골(타타르), 서쪽의 오이라트 등 세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1434년 동몽골의 지도자 아루그타이는 오이라트에게 패배하여 오이라트가 몽골을 지배하게 되었다. 오이라트의 지도자 토곤은 자신의 딸을 젊은 동몽골 칸과 결혼시켜 권력을 강화했다. 1440년 토곤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에센이 타이시 칭호를 물려받아 몽골을 통치했다.

명나라와 몽골의 관계에서, 몽골은 주로 자유 무역, 특히 말, 차, 비단 및 기타 사치품 교환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정부는 무역에 제한과 규정을 부과하여, 다퉁을 중심으로 몇몇 지정된 국경 도시로 무역을 제한했다. 에센의 권력과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러한 상품에 대한 그의 필요성도 커졌다. 이는 1440년대 후반 다퉁으로 유입되는 몽골인의 수를 크게 증가시켰으며, 매년 최대 2,000명이 도착했다. 그러나 다수의 무장한 기병은 명나라 당국에 심각한 안보 문제를 제기했다.

오이라트는 유목 국가의 특성상 경제를 교역에 의존했기 때문에 중국 물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명나라와는 원래부터 조공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공 무역에서 조공에 대한 사례로 하사되는 금품의 양은 사절의 수에 비례했는데, 에센 시대에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오이라트는 더 많은 교역품을 얻기 위해 명나라가 제한한 50명의 정원을 초과하여 사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1440년대에는 사절의 총원이 1,000명을 넘었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났다(이 사절들 중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무슬림 상인이 많았다고 한다).

1448년 겨울, 오이라트는 사절 파견에 관해 3,598명이 조공할 것이라고 명나라에 통보했다. 이 과대한 사절에 대한 사례 하사는 명나라의 큰 국고 부담이 되었고, 실제로 방문한 사절의 수를 조사한 결과 3,598명은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진 수치였던 것이 밝혀졌다. 이에 명나라는 기존의 오이라트에 대한 후대를 철회하고, 1448년 사절에 대한 하사량을 3,598명분의 20% 정도로 감액했다. 에센은 또한 이 조공 사절 파견에 관해, 예전에 약속했다고 하면서 명나라 황녀와 에센의 혼인도 청했지만, 그것은 명나라 통역관들이 독단적으로 에센과 약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는 그 청을 거절했다.

2. 2. 명나라의 군사 상황 (영어 문서)

영락제 사후 명나라의 북방 국경 방어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자원 부족에 대해 불만을 표현했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1435년과 1438년에 일부 수비대가 증강되었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내륙에서는 ''위소(Weisuo)'' 수비대의 예상 병력 250만 명 중 절반만이 실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군사 농민들은 장교들에게 착취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내륙으로부터 부족한 곡물 공급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훈련, 무기 및 장비의 질이 저하되었다. 북경 수비대는 방어 시설과 같은 건설 프로젝트에 자주 동원되었지만, 황궁의 장교와 환관들의 궁궐, 사찰, 개인 주택 건설에 더 자주 동원되었다.

북방 국경 방어는 주로 중국과 스텝 지역 사이에 집중되었는데, 현재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전초 기지는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 당시에는 만리장성이 건설되지 않았고, 국경은 요새화된 도시들 사이의 순찰대에 의해서만 경비되었다. 북동쪽 방어는 선부, 대동, 북경의 세 주요 요새 도시에 의존했다. 북경의 요새화는 1445년까지 완료되지 않았다. 선부에는 9만 명의 병력이 있었고, 그중 3만 5천 명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었고 5만 5천 명은 훈련 중이었다. 또한 2만 5천 명의 기병과 여러 종류의 9천 개의 화기를 비롯하여 9만 개의 수류탄이 있었다. 대동은 3만 5천 필의 말을 보유한 더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북경의 16만 명의 병력에 의해 지원받았다. 예비군은 중국 북동부, 특히 지리, 산동, 하남에 주둔한 수비대로 구성되었다.

국경 순찰 대대는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적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선부가 북경에서 불과 180km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방어 체계는 심도가 부족했고, 어떤 공격에도 신속하고 결정적인 대응에 의존했다.

3. 토목의 변

1449년 7월, 에센 타이시는 토크토아 부카와 협력하여 명나라를 침공했다. 몽골군은 세 방향으로 진격했는데, 에센이 이끄는 중앙군은 산시성 다퉁으로 진군했고, 토그토아 부카 칸과 우량카이 부족은 동쪽의 요동을, 다른 몽골군은 선부를 공격했다. 이 침공의 주요 목표는 선부와 대동의 요새 도시를 점령하여 중국 북부 지역으로의 접근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7월 20일, 습격 소식이 베이징에 전해지자 황제는 4명의 장군과 4만 5천 명의 병사를 대동과 선부로 파견하여 국경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30일, 에센이 이미 대동을 공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영종제는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고 8월 1일 군대를 이끌고 직접 원정을 가겠다고 선포했다.

왕진은 영종에게 친정을 간청했고, 영종은 이를 받아들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병부상서 광예와 우겸 등은 군주가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인사부상서 왕직은 반대하는 관리들을 대표하여 상소문을 작성하여, 장교들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임명된 반면, 황제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의 걱정에 감사를 표했지만, 자신의 계획을 바꾸지는 않았다.

8월 3일, 에센의 군대는 양하에서 보급이 부족한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같은 날, 영종제는 그의 동생인 성왕 주기유를 임명하여 원정 기간 동안 수도의 행정을 감독하게 했다.

7월 15일, 에센은 만리장성 양고현에서 침입하여 명나라 수비군과 충돌하여, 명나라 지휘관 송영과 주면이 전사하였다. 7월 17일, 정통제는 이복동생인 주기욱에게 후사를 맡기고, 친정군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하였다. 친정군은 북경에서 거용관을 통과하여 선부(현재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구)를 경유하여 대동 방면으로 초원 지대를 서진하였다.

명군 내부에서는 폭우로 인한 진흙탕과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동요가 발생하였다. 거용관에서는 문무백관이 북경으로의 귀환을 요구하였으나, 왕진은 이를 거절하였다. 왕진을 암살하려는 반대파의 계획이 발각되었다. 8월 1일, 명군은 대동에 도착하였으나, 환관 곽경으로부터 전선 부대가 거의 전멸했다는 보고를 들은 왕진은 오이라트 군의 위협을 알고, 폭우를 이유로 후퇴를 시작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폭우로 진흙탕이 된 길과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 왕진은 자신의 고향인 위주(蔚州)로 영종을 안내하려 했으나, 곽등(郭登)과 조내 등의 반대로 경로를 북쪽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 경로는 오이라트 기병대의 추격을 받기 쉬웠다.

1449년 8월 13일, 에센은 후퇴하는 명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명군의 오극충(吳克忠)과 오극근, 주용, 설수 등이 요아령(鷂兒嶺)에서 전사했다. 명군은 회래성(懷來城)에서 20km 떨어진 토목보(土木堡)에 도착했고, 왕진은 1,000량의 수레를 이끌고 성에 도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야영을 명했다. 곽야(鄺埜)는 거용관으로 진입할 것을 제안했으나, 왕진은 토목보 주둔을 고집했다.

토목보는 고원 지대로 물이 부족했고, 남쪽의 하천 주변은 오이라트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은 심각한 식수 부족에 시달렸다. 8월 15일, 에센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은 명군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명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왕진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내분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대패했다. 명나라 군사 절반이 전사했고, 백 명이 넘는 문무 관료들도 모두 전사했다. 영종은 포로가 되었고 왕진은 혼란 속에서 번충(樊忠)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번충 또한 전사했다. 많은 군수물자를 오이라트 군에게 빼앗겼다.

명나라 군대의 원정은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지 않았고, 총사령관이 군사 전문가가 아닌 왕진이었던 점 등이 대패의 원인이었다. 50만 명군에 비해 오이라트 군은 2만 기병에 불과했기에, 승리한 에센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3. 1. 몽골의 침입 (영어, 일본어 문서)

1449년 7월, 에센 타이시는 대규모로 중국을 침략했고, 몽골군은 세 방향으로 진격했다. 에센이 이끄는 중앙군은 산시성 다퉁으로 진군했다. 토그토아 부카 칸과 우량카이 부족은 동쪽의 요동을 공격했고, 두 번째 몽골군은 선부를 공격했다. 이 전투의 주요 목표는 선부와 대동의 요새 도시를 점령하여 중국 북부 지역으로의 접근을 무제한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7월 20일, 습격 소식이 베이징에 전해지자 황제는 베이징 주둔군에서 4명의 장군과 4만 5천 명의 병사를 대동과 선부로 파견하여 국경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30일, 에센이 이미 대동을 공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영종제는 신하들과 상의하지 않고 8월 1일 베이징 주둔군의 동원을 명령하고 직접 원정을 이끌겠다고 선포했다.

왕진은 영종에게 친정을 간청했고, 영종은 이를 받아들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병부상서 광예와 그의 부하 우겸 등은 군주가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모험이라고 반대했다. 인사부상서 왕직은 반대하는 관리들을 대표하여 상소문을 작성하여, 장교들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임명된 반면, 왕조와 제국의 수장이자 온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인물은 위험에 자신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의 걱정에 감사를 표했지만, 자신의 계획을 바꾸지는 않았다.

8월 3일, 에센의 군대는 양하에서 보급이 부족한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같은 날, 영종제는 그의 동생인 성왕 주기유를 임명하여 원정 기간 동안 수도의 행정을 감독하게 했다.

1449년(정통 14년) 7월, 에센은 토크토아 부카와 협력하여 섬서, 산서, 요녕 3방면에서 명나라 영토로 침입하였다. 중앙군을 이끌고 산서로 침공한 에센은 기병 2만 명으로 대동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명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 왕진은 정통제에게 친정을 요청하였다. 조정 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진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50만이라 칭하는 대군이 소집되어 20명의 무관과 많은 문관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7월 15일, 에센은 만리장성의 양고현에서 침입하여, 명나라 서녕후 송영과 무진백 주면 등이 이끄는 수비군과 충돌하여, 송영과 주면이 전사하였다. 7월 17일, 정통제는 이복동생인 주기욱에게 후사를 맡기고, 친정군을 이끌고 북경을 출발하였다. 친정군은 북경에서 거용관을 통과하여 선부(현재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구)를 경유하여 대동 방면으로 초원 지대를 서진하였다.

명군 내부에서는 폭우로 인한 진흙탕과 이에 따른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동요가 발생하였다. 거용관에서는 문무백관이 북경으로의 귀환을 요구하였으나, 왕진은 그 의견을 거절하였다. 왕진을 암살하려는 반대파의 계획이 발각되었다. 8월 1일, 명군은 대동에 도착하였으나, 대동청에 파견되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심복 환관 곽경으로부터 전선 부대가 거의 전멸했다는 보고를 들은 왕진은 오이라트 군의 위협을 알고, 폭우를 이유로 후퇴를 시작하였다. 이때 “이 진군은 승리로 끝났다”라고 선언하여 모두가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3. 2. 명나라의 반격과 패배 (영어, 일본어 문서)

명나라 군대는 폭우로 진흙탕이 된 길과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 거용관에서는 문무백관들이 북경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으나, 왕진은 이를 무시했다. 왕진은 자신의 고향인 위주(蔚州)로 영종을 안내하려 했으나, 대동 총병 곽등(郭登)과 대학사 조내 등의 반대로 경로를 북쪽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 경로는 기동력이 뛰어난 오이라트 기병대의 추격을 받기 쉬웠다.

1449년 8월 13일, 에센은 선부를 경유하여 후퇴하는 명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명군의 공순백 오극충(吳克忠)과 그의 동생 오극근 등이 전사했고, 성국공 주용과 영순백 설수가 요아령(鷂兒嶺)에서 전사했다. 명군은 회래성(懷來城)에서 20km 떨어진 토목보(土木堡)에 도착했고, 왕진은 1,000량의 수레를 이끌고 성에 도착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야영을 명했다. 병부상서 곽야(鄺埜)는 거용관으로 진입할 것을 제안했으나, 왕진은 "썩은 유생이 어찌 군사를 알겠는가. 다시 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며 격노하여 토목보 주둔을 고집했다.

토목보는 고원 지대로 수원(水源)이 부족했고, 토목보 남쪽의 하천 주변은 오이라트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은 심각한 식수 부족에 시달렸다. 8월 15일, 에센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은 명군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명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왕진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내분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이 공격을 막지 못하고 대패했다. 명나라 군사 절반이 전사했고, 백 명이 넘는 문무 관료들도 수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했다. 영종은 포로가 되어 에센의 진영으로 끌려갔다. 왕진은 오이라트 군에게 살해당했거나, 혼란 속에서 호위 장군 번충(樊忠)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왕진을 죽였다고 전해지는 번충 또한 전사했다. 또한, 많은 군수물자를 오이라트 군에게 빼앗겼다.

명나라 군대의 원정은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지 않았고, 총사령관이 군사 전문가가 아닌 왕진이었던 점 등이 대패의 원인이었다. 50만 명군에 비해 오이라트 군은 2만 기병에 불과했기에, 승리한 에센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4. 북경 방어전 (영어, 일본어 문서)

에센은 토목보에서 사로잡은 영종을 인질로 삼아 명나라와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북경 조정은 영종의 이복동생인 주기옥(경태제)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병부시랑(현재의 국방부 차관) 우겸은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자는 주장에 반대하며, 이를 제안하는 자는 처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그는 주요 내시와 대학사들의 지지를 얻어 공황 상태에 빠진 관리들을 진정시켰다. 우겸은 정치 상황을 장악하고 병부의 최고위 관리로서 방위 준비를 감독했다. 그는 북경 근처 통주의 창고에서 곡물을 수송하도록 했고, 영왕(훗날 경태제)은 우겸의 군사력 증강 계획을 지지했다.

북경 관리들은 명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영왕에게 황제 역할을 맡을 것을 요청했고, 영왕은 경태제로 즉위했다. 그는 자신의 형 영종을 상황제(太上皇)로 선포했지만, 이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명예로운 칭호였다.

우겸은 북경 방어를 위해 선부 등지에서 8만 명의 병사를 철수시켰고, 예비군을 소집하여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하고 방어를 조직했다. 우겸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는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북경 방어에 성공했다. 결국 에센은 영종을 데리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5. 결과

에센은 포로로 잡은 영종이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1450년에 무조건 석방했다. 영종은 태상황이 되었으나 궁에 유폐되었다.

1457년, 경태제가 병석에 눕자 석형(石亨), 조길상(曹吉祥), 서유정(徐有貞) 등이 정변을 일으켜 영종이 복위하고 연호를 천순으로 바꾸었다. 경태제가 붕어하자, 경태제를 옹립했던 우겸(于謙)과 왕문은 처형되었다(「탈문의 변(奪門の変)」).

토목의 변은 명나라의 대대적인 개편과 군사 개혁을 촉발했고, 이는 15세기 후반 명나라의 상대적인 안정에 기여했다.

5. 1. 에센의 몰락 (일본어 문서)

에센은 토목보를 포위하여 명나라 황제 영종을 사로잡았는데, 이를 토목의 변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상 외적과의 전쟁 중 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은 북송 시대 정강의 변으로 흠종과 휘종이 사로잡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에센은 토크토아 부하 칸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1453년(경태 4년)에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칸을 자칭했다. 그러나 이듬해 부하 알락 템무르(아라지원)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제국은 토목의 변으로부터 불과 5년 만에 붕괴되었다.

6. 영향

토목의 변은 명나라와 북방 민족 간의 교역 감소를 초래하여 동아시아 정세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철제품을 교역에 의존하던 아이누족은 일본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코샤마인의 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은 큰 충격이었으나, 요새화된 도시들이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 영토 변화는 없었고, 양측 관계는 곧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토목의 변은 명나라의 대대적인 군사 개혁을 촉발하여 15세기 후반 상대적인 안정에 기여했다.

6. 1. 명나라의 변화 (영어 문서)

1639년에 출판된 ''준기투설(Junqi Tushuo)''에 묘사된 훈련 대형을 갖춘 명나라 소총병들의 그림이 있다.
1635년에 출판된 ''준기투설(Junqi Tushuo)''에 묘사된 훈련 대형을 갖춘 명나라 소총병들


1424년 영락제가 사망한 후 명나라의 북쪽 국경 방어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자원이 부족하다고 불평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1435년1438년에 일부 수비대가 증강되었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내륙에서는 ''위소(Weisuo)'' 수비대의 예상 병력 250만 명 중 절반만이 실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군사 농민들은 장교들에게 착취당하는 경우가 많아 내륙으로부터 부족한 곡물 공급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훈련, 무기 및 장비의 질이 저하되었다. 북경 수비대는 방어 시설 건설에 자주 동원되었지만, 황궁 장교와 환관들의 궁궐, 사찰, 개인 주택 건설에 더 자주 동원되었다.

북쪽 국경 방어는 주로 중국과 스텝 지역 사이에 집중되었는데, 현재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전초 기지는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만리장성이 건설되지 않았고, 국경은 요새화된 도시들 사이의 순찰대에 의해서만 경비되었다. 북동쪽 방어는 선부, 대동, 북경의 세 주요 요새 도시에 의존했다. 북경의 요새화는 1445년까지 완료되지 않았다. 선부에는 9만 명의 병력이 있었고, 그중 3만 5천 명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었고 5만 5천 명은 훈련 중이었다. 또한 2만 5천 명의 기병과 여러 종류의 9천 개의 화기를 비롯하여 9만 개의 수류탄이 있었다. 대동은 3만 5천 필의 말을 보유한 더 강력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북경의 16만 명의 병력에 의해 지원받았다. 예비군은 중국 북동부, 특히 지리, 산동, 하남에 주둔한 수비대로 구성되었다.

국경 순찰 대대는 주력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적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선부가 북경에서 불과 180km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방어 체계는 심도가 부족했고, 어떤 공격에도 신속하고 결정적인 대응에 의존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힌 것은 초기에는 큰 충격이었지만, 요새화된 도시들은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몽골이 영토를 영구히 점령하는 것을 막았다.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토 변화는 없었으며, 몇 달 후 양측의 관계는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토목의 변은 명나라 당국의 대대적인 개편과 군사 개혁을 촉발했고, 이는 궁극적으로 15세기 후반 명나라의 상대적인 안정에 기여했다.

6. 2. 동아시아 정세 변화 (일본어 문서)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의 북방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저하되면서 명나라와 북방 민족 간의 교역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일본에서는 제철 기술이 없던 아이누가 그동안 철제품을 북방 민족이나 일본인과의 교역에 의존해 왔는데, 북방 민족으로부터의 철제품 획득이 어려워지면서 일본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는 가격 협상에서 아이누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코샤마인의 난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7. 평가

토목의 변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요새화된 도시들이 몽골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면서 몽골이 영토를 영구적으로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토 변화는 없었으며, 몇 달 후 명나라와 몽골 양측의 관계는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몽골의 주요 목표는 영토 확장이 아니라 중국과의 안정적인 무역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에센은 전투 이후 명나라와 빠르게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에센은 승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몽골 내부에서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고, 그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1453년 에센은 스스로 칸이라 칭했지만, 불과 2년 만에 살해당했다.

토목의 변은 명나라 조정이 대대적인 개편과 군사 개혁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15세기 후반 명나라의 상대적 안정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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